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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핀 연꽃처럼 생긴, 불심가득한 절경의 섬 연화도
500여년 역사의 사찰인 ‘연화사’, 용머리 모양의 바위절벽(통영 8경), 해안계곡을 건너는 출렁다리
연화도의 이름처럼, 북쪽 바다에서 바라보는 섬의 형상은 꽃잎이 하나둘씩 떨어져 있는 연꽃 같습니다. 섬에 발을 디뎠을 때 바라보는 경치는 풍성한 입체감을 자아내며 섬 풍경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합니다. 연화포구의 사방은 세월과 파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해식애로 형성되어 있기에, 어디를 가든 감탄이 나오지만, 그래도 연화도의 절경은 동쪽 끄트머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풍수적으로 용의 형상이라는 연화도에서, 머리를 차지하여 용머리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파도 속에서도 솟아나 있는 네 바위 섬들의 군상이 멋진 경치를 자아내며. 특히 노을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사되는 바다와 바위들의 어울림은 한 폭의 유채화 같습니다. 용머리 옆의 네 바위섬 거북바위 틈 속에는 낙락고송 한 그루가 꼿꼿하게 서 있는데, 물 한 방울 없는 바위틈에서 살아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수백 년 한결같은 모습은 자연에 대한 경이감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연꽃 연(蓮)에 꽃 화(花)자로 연꽃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섬
연화도가 이런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된 유래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시대 연산군 제위, 숭유 억불정책으로 많은 승려들이 핍박받자 이를 피하고자 연화도사가 비구니 3명과 함께 연화봉에 암자를 지어 수도하면서 은신했다고 합니다.
연화봉 아래에 위치한 넓은 바위에는 연화도사가 손가락으로 썼다는 “부, 길, 재”세 글자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연화도사가 죽으면서 수장해달라는 유언에 따라 수장을 하자, 그의 시신이 한 송이 연꽃으로 승화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후로 연화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섬의 모양이 바다 한 가운데 핀 연꽃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유래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며 왜적과 싸웠던, 당대의 유명한 도승인 사명대사가 스승인 연화도사의 뒤를 이어 연화도에 머물면서 수도하였는데, 사명대사의 누이와 약혼녀, 그리고 또 다른 비구니 한명도 연화도에 머물며 사명대사가 떠난 이후에도 줄곧 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 비구니를 일러 “자운선사”라 하였다는데, 이들은 일찍이 득도하여 만사에 능통하여 당시 좌수영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만나 앞으로 닥쳐올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 수군의 대비책과 거북선 조선법, 해양지리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또한 이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의 몸에도 불구하고 직접 해전에 참가하여 승전에 동참했다는 말도 있습니다.